아시카가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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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1436년에 태어나 1490년에 사망한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이다. 1441년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암살당한 후 형의 요절로 1449년 쇼군에 취임했다. 그는 쇼군 재위 기간 동안 가마쿠라 구보, 간토 간레이 간의 갈등에 개입하고 쇼군 친정 체제를 강화하려 했으나, 측근 세력과 정실 부인 히노 도미코 등의 정치 개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후계자 문제와 가문 간의 다툼이 겹쳐 1467년 오닌의 난이 발발했고, 요시마사는 난을 수습하지 못하고 문화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히가시야마 산장을 건설하고 은각을 건립하는 등 히가시야마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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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카쓰는 1434년에 태어나 1442년 9세의 나이로 무로마치 막부의 7대 쇼군이 되었으나, 정치적 능력 부족으로 실권을 호소카와 모치유키 등이 장악했고, 1443년에 1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자녀 - 아시카가 요시미
아시카가 요시미는 6대 쇼군의 아들로 태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여 쇼군의 후계자가 되었고, 오닌의 난 이후 아들이 쇼군이 되자 정무를 보다가 사망했다. - 1490년 사망 - 마차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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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은 1467년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문제로 시작되어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11년간 교토를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내전이며, 아시카가 막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센고쿠 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다. - 아시카가 요시마사 - 히노 도미코
히노 도미코는 무로마치 시대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정실로, 막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오닌의 난 권력 다툼 개입, 쇼군 후계자 옹립 역할 수행, 막부 좌지우지, 민중 반발 야기 등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며, 후지와라 도미코로 불렸다는 주장도 있고 다양한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2. 생애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아들로, 어린 시절 이름은 미하루(三春)였다.[2] 정실 부인은 히노 토미코였다.
1443년, 10세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카쓰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막부는 요시카쓰의 동생 요시나리(義成)를 새 쇼군으로 임명했다.[3] 요시나리는 몇 년 후 요시마사로 개명했다.[4]
1443년, 남조 지지자들이 일본 황실의 삼종신기를 훔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1445년,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교토의 간레이(管領)가 되었다. 1446년 남조 군대가 패배하고, 1448년 남조 잔당이 진압되었다. 1449년, 요시마사가 쇼군으로 임명되었고,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간토 큐보(関東管領)가 되었다. 1450년부터 1455년까지 가마쿠라에서 간토 큐보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우에스기 간레이 사이에 소란이 있었다.[5]
1450년대에는 오닌의 난의 발판이 된 여러 사건들이 발생했다. 1454년, 하타케야마 가문의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가마쿠라에서 큐보와 우에스기 간레이 간의 불화는 1455년 "고가 구보"(1455~1583) 설립으로 이어졌고, 1457년에는 "호리고에 구보"(1457~1491)가 설립되었다. 1458년, 도난당했던 칙천이 북조에 반환되었다. 1460년, 하타케야마가 요시마사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1464년, 요시마사는 아시카가 요시미를 양자로 삼았다. 1466년,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태어났고, 고쓰치미카도 천황이 즉위했다. 같은 해 시바 씨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5][6]
요시마사는 쇼군직에서 물러난 후 요시히사가 다음 쇼군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요시히사가 요절하자 다시 권력을 잡았다. 요시마사는 동생 요시미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1489년, 요시타네가 쇼군이 되었고, 요시마사는 은퇴했다.
1490년 요시마사가 죽기 전, 그는 조카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이번에는 동생 마사토모의 아들이었다. 요시타네는 요시마사보다 오래 살았지만, 그의 통치는 짧았다. 요시타네는 1493년에 죽었다.[9]
요시마사의 뒤를 이은 쇼군은 요시히사(친아들), 요시타네(첫 번째 양자), 요시즈미(두 번째 양자)였다. 요시즈미의 자손이 쇼군직을 직계 계승했다. 이후 외부 세력의 권력 투쟁으로 요시타네의 증손자가 막부의 아시카가 쇼군가 지도자로 임명되는 짧은 기간이 있었다.[9]
요시마사는 히노 도미코(히노 가쓰미쓰의 여동생)와 결혼하기 전에 오이마라는 소실이 있었는데, 도미코가 계단에서 밀어 유산하게 만든 당시 임신 8개월이었다.
-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
- 어머니: 히노 시게코(日野重子)(1411–1463)
- 아내: 히노 토미코(日野富子)(1440 – 1496년 6월 30일)
- 소실: 오오다테 사치코(大館幸子)
- 자녀:
- * 토미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1459년생)
- *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尚)(토미코 사이에서 태어남)
- * 토미코 사이에서 태어난 딸 (1463–1486)
- * 토미코 사이에서 태어난, 케이쿄지(慶教寺)의 승려 고야마 마사토시(小山政俊)(1462–1505)
- * 사치코 사이에서 태어난 유야마 스즈호(湯山宗方)(1455–1532), 후일 소지인(宗旨院)
- 양자:
- *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視)
- *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種)
2. 1. 쇼군 취임 (1436년 ~ 1449년)
에이쿄 8년(1436년) 1월 2일, 제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키쓰 원년(1441년)에 아버지 요시노리가 가키쓰의 난으로 아카마쓰 미쓰스케에게 암살당하자, 형 아시카가 요시카쓰가 쇼군직을 이었다.[2] 그러나 1443년에 쇼군 요시카쓰가 요절하면서, 요시마사는 간레이 하타케야마 모치쿠니의 후견을 받아 8세의 나이로 쇼군직에 선출되었다.[3] 호토쿠 원년(1449년)에 정식으로 제8대 쇼군으로 취임했다.[4]1443년, 남조 지지자들이 일본 황실의 삼종신기를 훔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1445년,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교토의 간레이(管領)가 되었다. 1446년에는 남조의 군대가 패배했고, 1448년 남조의 잔당이 진압되었다. 1449년, 요시마사가 쇼군으로 임명되었다.[5]
2. 2. 친정에서 측근 정치로 (1449년 ~ 1464년)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초기에는 조부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부친 요시노리의 정책을 부활시키려 노력했다. 가마쿠라 구보(후의 고가 구보)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가문 사이의 내분(교토쿠의 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게우지 토벌령을 내리고 이복형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호리고에 구보로 파견했다.[46] 만도코로시쓰지[47] 이세 사다치카 등을 중심으로 하는 쇼군 측근 집단을 기반으로 쇼군 친정권 강화를 꾀했다. 이 시기의 무로마치 막부를 '''요시마사 전제'''(義政専制) 체제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49]그러나 유모 오이마(御今), 가라스마 스케토, 아리마 모치이에(이들을 '삼마(三魔)'라고 불렀다)[50]와 정실 히노 도미코의 친정인 히노 가문, 유력 슈고 다이묘 등이 정치에 개입하여 쇼군으로서 정치 주도권을 잡는 것은 어려웠다.
당시 슈고 다이묘 가문에는 가독 상속으로 인한 내분이 많았고, 요시마사는 이 상속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나, 가가 슈고 도가시 가문의 내분에서는 간레이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451년 오와리 슈고다이 오다 가문의 내분에 개입했으나, 오와리 슈고 시바 가문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러한 대립으로 요시마사는 점차 정치에 관심을 잃어갔다.
1459년 정월 9일, 부인 히노 도미코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같은 날 요절했다. 1461년에는 간쇼의 대기근에도 불구하고 꽃의 궁궐(花の御所)을 개축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여 비판받았다.
2. 3. 후계자 문제와 오닌의 난 (1464년 ~ 1473년)
1464년, 요시마사는 히노 도미코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출가했던 동생 요시미를 환속시켜 양자로 삼고 후계자로 결정했다.[7] 그러나 1465년에 도미코가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낳으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8] 도미코는 요시히사가 쇼군이 되기를 바라며 야마나 소젠에게 협력을 부탁했고, 요시미는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손을 잡았다.이러한 쇼군 가문의 후계자 다툼에 더해, 시바 씨와 하타케야마 씨의 가독 상속 문제가 겹쳐, 1467년에 오닌의 난이 발발했다.[8] 요시마사는 전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렌가 모임과 같은 문화 활동에 몰두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
1473년, 서군의 야마나 소젠과 동군의 호소카와 가쓰모토가 사망하자, 요시마사는 12월에 아들 아시카가 요시히사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거했다.[5]
2. 4. 만년 (1473년 ~ 1490년)
오닌의 난 이후에도 요시마사는 은거하여 문화적인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482년에는 히가시야마 산장(은각)의 조영을 시작했다.[33] 1485년 5월, 요시히사의 측근 봉공중(奉公衆)[51]과 요시마사의 측근 부교슈가 무력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져, 요시마사와 요시히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해 6월, 요시마사는 이 사건 때문에 삭발하고 출가하여 사실상 정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로 결정하였다.1489년 3월, 아들 요시히사가 육각 토벌 전투 중에 사망하자, 요시마사는 다시 정무를 맡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실제로 정무를 맡게 되었다.[9] 그러나 8월에 중풍으로 쓰러지고, 10월에 다시 쓰러져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이때 요시마사는 마침내 동생 요시미와 그의 아들 요시타네의 면회를 허락했다.[9] 요시마사는 요시타네를 양자로 삼아 쇼군으로 지명했다.
1490년 1월 7일, 요시마사는 은각의 완성을 기다리지 못하고 향년 55세(만 54세)로 사망했다.[9]
3. 평가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공무(公武)의 직역고실(有職故実)에 깊은 관심을 가져, 기요하라 나리타다(清原業忠)·무네카타 부자를 측근으로 삼아 연구에 힘썼으며, 스스로도 여러 기록을 남겼다. 센고쿠 시대 이후 이세씨(伊勢氏)나 오가사와라씨(小笠原氏)의 무가 고실(武家故実)에도 요시마사를 거쳐 계승된 것이 많다.
요시마사는 와카(和歌) 애호가로도 알려져, 현재 전해지는 것만 약 1500수에 달하며, 자선(自選) 『지쇼인 자카고(慈照院自歌合)』를 편찬했다. 간세이(寛正) 6년(1465년)부터 칙선와카슈(勅撰和歌集) 편찬에도 관여했지만, 오닌의 난으로 중단되었다. 한시(漢詩)와 렌가(連歌)도 즐겼다고 한다.
나가이 미치코(永井路子)는 요시마사를 미나모토노 사네토모(源実朝)와 매우 닮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3. 1. 긍정적 평가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으로, 그의 통치 기간은 문화적으로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특히 히가시야마 문화의 발전은 요시마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손꼽힌다.[10]요시마사는 젠아미(善阿弥), 가노 마사노부(狩野正信), 온아미(音阿弥)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다도(茶道), 꽃꽂이(華道), 노(能) 연극, 수묵화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요시마사는 히가시야마 산장(은각사(銀閣寺))을 건설하여 히가시야마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12] 1460년부터 건설이 시작된 이 산장은[12] 요시마사 사후 지쇼지(慈照寺)라는 불교 사찰, 즉 은각사(銀閣寺)로 바뀌었다.[13] 1482년 2월 21일에는 은각사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4] 1490년 1월 27일, 요시마사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15] 히가시야마 산장은 히가시야마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남았다.
히가시야마 문화는 선종 불교의 영향을 받아 와비사비와 같은 일본 특유의 미학을 발전시켰으며, 귀족 문화와 무사 문화의 조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0]
요시마사는 1451년에 중단되었던 감합 무역을 부활시켜 경제 교류와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3. 2. 부정적 평가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정치적으로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닌의 난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4] 또한, 간쇼의 대기근 속에서도 하나노 고쇼를 개축하는 등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4] 후계자 문제 등 중요한 결정에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 혼란을 야기했다는 점도 부정적 평가의 한 요인이다.[4]나가이 미치코(永井路子)는 요시마사의 선대인 아시카가 요시카타(足利義教)의 독재와 그 최후를 고려하여, "주위 사람들이 요시마사를 '죽지 않도록, 살지 않도록' 장식으로 키웠다. 요시마사의 인격과 치세는 그러한 왜곡된 교육의 결과다"라고 평가했다.[5]
아카마츠 토시히데(赤松俊秀)는 "무능의 낙인을 찍는 것은 불쌍하다. 쇼군으로서 훌륭하게 행동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막부의 쇠퇴라는 실패로 끝나버린 것뿐이다"라고 평가했다.[6]
3. 3. 히가시야마 문화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정치적으로는 무능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큰 공적을 남겼다. 요시마사는 젠아미, 가노 마사노부, 온아미 등을 후원하며 히가시야마 산장(東山山荘)을 건축하였는데, 훗날 지쇼지(慈照寺)가 되었고, 은각(銀閣)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 시대의 문화를 히가시야마 문화라고 부르며, 금각으로 대표되는 기타야마 문화와 대비되어 와비 사비를 중시하는 일본 전통 미의식의 정수로 평가받는다.[10]히가시야마 문화는 선종(禪宗)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와비사비(侘寂)와 같은 일본 미학과 궁정 귀족(公家) 문화와 무사(武士) 문화의 조화를 보여주었다.[10] 요시마사의 통치 기간 동안 일본에서는 다도(茶道), 화도(華道) 또는 이케바나(生け花), 노(能) 연극, 그리고 먹 그림 등이 발전하였다.[10]
히가시야마 문화 시대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459년'''(長禄3년): 요시마사는 아쓰타 신사 수리 기념으로 새로운 신여(神輿)와 의복 및 기타 장비 일체를 제공하였다.[11]
- '''1460년'''(長禄3년): 요시마사는 은퇴 별장과 정원 건설을 시작하였고,[12] 그의 사후 이 부지는 지쇼지(慈照寺)라는 불교 사찰, 즉 은각사(銀閣寺)가 되었다.[13]
- '''1482년 2월 21일'''(文明14년 2월 4일): 은각사(銀閣寺) 건설이 시작되었다.[14]
- '''1490년 1월 27일'''(延徳2년 1월 7일): 요시마사가 히가시야마도노(東山殿) 저택에서 56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15] 히가시야마 문화는 종말을 맞이하였다.
4. 요시마사의 휘(헨기)를 받은 사람
- '''요시시게(義成) 시대'''
- '''요시마사(義政)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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